현충 시설 현황
목포시 현충탑
- 관리자 : 목포시
- 관리번호 : 53-2-22
- 종류 : 탑
- 건립시기 : 2007-02-09
- 지정일 : 2007-05-03
- 주소 : 옥암동 산 66-51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시고자 옥암동에 조성하게 되었다. 조형물의 형상은 알을 품고 자신의 종족을 수호하는 한 마리 비둘기의 모습으로 순국선열등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형상화하여 추모의 마음을 높이고 공경하는 마음이 목포시민과 함께하기 위한 공원으로 2007년 1월 완공되었다.
참전용사 기념탑
- 관리자 : 목포시
- 관리번호 : 53-2-23
- 종류 : 탑
- 건립시기 : 2009-08-07
- 지정일 : 2009-09-22
- 주소 : 옥암동 1059
참전용사 기념탑은 조국을 위하여 불굴의 투혼을 발휘, 몸과 마음을 바쳤던 참전용사들의 헌신적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주탑 14미터를 중심으로 주변 8개의 기둥에 6·25 및 베트남 참전 부대 마크를 부착하고 승리를 상징하는 V의 주탑 사이에 애국심의 표상인 태극 문양을 넣어 탑의 위상과 자긍심을 높였으며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현대적 미의 감각을 겸비한 조형성과 예술성이 높은 탑으로 그날의 승리, 그날의 정신 계승, 새로움을 품고 내일을 꿈꾸는 탑의 내용을 내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2009년 10월 9일에 건립하였다.
3·1독립운동 탑
- 관리자 : 유달산공원 관리사무소
- 관리번호 : 53-1-01
- 종류 : 탑
- 건립시기 : 1983-08-15
- 지정일 : 2002-11-02
- 주소 : 죽교동 400-3(유달산공원 내)
3·1독립만세운동 사건 발생 이후 1919년 4월 8일 목포시 주민 등 만세 사건 참여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1983년 8월에 건립하였다. 자주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주권을 무력으로 찬탈한 침략주의 일본의 강제 통치로 말미암아 암흑과 질곡에 신음하던 한민족은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 방방곡곡에 태극기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목포에서도 박상렬의 주도로 이해 4월 8일 상오 10시를 기해 시민과 학생이 총궐기, 독립선언문과 경고문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일제를 놀라 떨게 함으로써 한인의 독립 혼을 만방에 널리 알렸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80여 명이 체포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목포 양동교회 3.1운동 만세 시위지
- 관리자 : 목포양동교회
- 관리번호 : 53-1-20
- 종류 : 장소
- 건립시기 : 1911-01-01
- 지정일 : 2015-05-14
- 주소 : 호남로 15(양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양동교회 및 기독교계 학교인 영흥학교, 정명 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계획되었다. 지역유지이자 양동교회 교인인 곽우영(郭宇英) 등이 교회 측의 준비를 맡았으며, 남궁혁(南宮爀) 등 청년들과 연락하며 태극기와 전단을 제작하였다. 또 목포상업학교와 목포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원하기로 임무를 분담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8일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정명 여학교 교사·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이날의 시위로 곽우영, 남궁혁 등 80여 명이 검속되었다. 이튿날에도 주도자들과 시위대는 검속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한편 만세 시위로 양동교회는 이경필 목사, 광우영 장로, 서상봉 집사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일경에 검거되는 시련을 겪었다.
독립 기념비
- 관리자 : 목포 정명 여자중학교
- 관리번호 : 53-1-02
- 종류 : 비석
- 건립시기 : 1985-12-31
- 지정일 : 2002-11-02
- 주소 : 삼일로 45(양동, 정명여자중학교 내)
1919년 목포 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 여학교·영흥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4월 8일 영흥학교 학생 김옥남이 친 비상 종소리를 신호로 정명 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 200여 명과 양동교회 교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2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한편, 1921년 11월 13일 정명 여학교 기숙사에서는 천귀례(千貴禮), 확희주(郭喜主) 등 11명이 모여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이튿날인 14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각기 태극기를 흔들면서 곧 출동한 일본 경찰에 많은 학생이 체포되었다. 한편, 1930년 2월 9일 정명 여학교 고등과 최이선, 강안식 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주도 학생들이 미리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이선 등 10여 명이 피체되고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박경조 경위 흉상
- 관리자 :목포해양경찰서
- 관리번호 : 53-2-29
- 종류 : 동상
- 건립시기 : 2012-12-21
- 지정일 : 2013-11-22
- 주소 : 청호로 219번길 34-22(노을공원 내)
전남 목포시 산정동 북항 친수공원 내에 불법 조업 어선을 단속하다 사망한 박경조 경위를 추모하기 위해 신안군민과 해양경찰이 2012년 12월 21일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박경조 경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1990년 순경으로 특채돼 2001년부터 목포해양경찰서에서 근무했고 2008년 2월부터 목포 해경 소속 경비정 3003함에서 병기장으로 근무해왔다. 특히 불법 조업 어선 나포의 공로가 인정돼 2006년 10월 해양경찰청장상을 받는 등 4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박경조는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경찰공무원으로서 2008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배타적경제수역 내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목포해양경찰서는 해당 중국 어선을 검문하는 과정을 촬영한 3003함의 채증 비디오 영상을 분석한 결과 고속 보트를 타고 중국 어선에 접근한 박경조 경위가 제일 먼저 배에 올라탄 순간 중국 선원이 휘두른 삽에 머리를 맞아 바다로 추락했다고 밝혔다.
김원 주무관 흉상
- 관리자 : 서해어업관리단
- 관리번호 : 53-2-37
- 종류 : 동상
- 건립시기 : 2018-07-25
- 지정일 : 2018-12-04
- 주소 : 청호로 219번길 34-22(노을공원 내)
故김원 주무관은 해양수산부 남해어업관리단 어업감독공무원으로서 특별사법경찰관(리) 지명을 받아, 국민의 재산 보호 및 해양주권 수호를 위해 힘써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위험성이 현저한 직무를 수행 중 사망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흉상을 건립하였다.
4.19혁명 기념비
- 관리자 : 목포시
- 종류 : 비석
- 건립시기 : 2008-04-19
- 주소 : 상동 1119-2(달맞이공원 내)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당 정부의 불의·부정·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혁명으로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정치인이나 사회단체의 개입 없이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에서 일어났던 것이 특징이며 이로써 자유당 정부는 붕괴되고 새로운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날 185명이 희생되었으며 우리 지역 출신으로는 채광석, 김부연 학생이 사망하고 고종채, 서병식 학생이 부상을 당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던 젊은이들의 교훈을 되새기고자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61년 4월 19일 유달산 중턱에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그러나 고지대 급경사로 접근이 어렵고 시설이 협소하여 현대적 미적 요소를 살린 새로운 조형물을 4월 혁명 48돌을 맞아 달맞이공원에 설치하게 되었다.